요즘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핫하다죠?
더불어 과거 맨해튼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역 오펜하이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이름은 미국 뉴욕시의 중심부이자 세계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인 맨해튼 섬에서 따온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1942년 1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 세 나라의 정상회담에서 처음 논의되었다. 당시 회담에서는 독일의 V-2 로켓 공격으로부터 미국 본토를 보호하기 위해 원자폭탄을 제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 등 세부 사항은 결정되지 않았다. 이후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근처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실시되었고,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 10일 소련에서도 같은 장소에서 첫 번째 핵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란 무엇인가요?
1945년 2월 초순 루스벨트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비밀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를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해 4월 12일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는 앞으로 5년 이내에 원폭을 제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미 육군 장관 조지 마셜 장군에게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했고, 위원회는 즉시 활동을 개시했다. 총책임자로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이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임명되었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주도하던 국제 과학 협력 기구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연구비 명목으로 1억 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기 개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194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상금을 받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어떤 사람인가요?
오펜하이머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1880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화학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수학과 자연과학을 배웠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철학과 역사 분야 책을 즐겨 읽었다. 대학 졸업 후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였던 하이젠베르크를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였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오펜하이머는 매우 사교적이고 쾌활한 반면, 하이젠베르크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다. 훗날 둘은 서로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하며 우정을 유지했다. 1919년 프린스턴대학교 교수가 된 오펜하이머는 곧이어 캘리포니아공과대학 학장직을 맡았다. 1920년대 중반 무렵 나치스 정권이 등장하자 유럽 각국 출신의 많은 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오펜하이머 역시 가족과 함께 1930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대신 학문에만 전념했다. 1940년 시카고대학교 총장 자리에 올랐으며, 이듬해 컬럼비아대학교 석좌교수가 되었다. 1949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부총장 겸 공학부장으로 부임하였고, 1951년 MIT 전기공학 및 응용물리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1954년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로도 활동했다. 1955년 록펠러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7년 다시 스탠퍼드대학교 공과대학장이 되었다. 1960년 예일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고, 1964년 세상을 떠났다.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오펜하이머지만 정작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런건가요?
그는 오랫동안 학계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성향 탓이었을 것이다. 즉, 인류 평화나 환경 보전보다는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전쟁 방지와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다 보니 기존의 권위주의 체제와는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히틀러 집권 초기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친나치 성향을 보였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때 나치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스스로 탈퇴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러한 전력 자체가 오펜하이머에게는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